<부다페스트에서 바르샤바까지, 기억의 지도 위를 걷다>

김명선

지난 5월, 내 생애 가장 긴 여행을 다녀왔다.

헝가리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5개국 12개 도시를 한 달간 여행했다.

항공권, 숙박, 도시 간 교통편을 예약해 놓고 일정을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한 무렵, 날벼락 같은 계엄사태가 벌어졌다.

여행을 취소해야 되나 고민했지만 환불 불가 예약이 많았고, 5월 전에 반드시 탄핵되고 선거까지 가능할 거란 확신에 그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내란불면증을 겪으며 유시민의 《유럽도시기행2》를 읽고, 미술사 책을 공부하면서 여행 블로그를 찾아보며 구체적 일정을 짰다.

여정은 밤이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됐다. 도시에는 강이 흐르고, 강에는 기억이 떠다닌다. 다뉴브 강가에 늘어선 철제 '신발조형물'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들의 기억을 붙잡고 있었다.

숲과 호수, 폭포가 겹겹이 쌓인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에서는 물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자연이 주는 위로와 안식을 얻었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을 따라 걸으며,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려도 붉은 지붕과 푸른 바다가 만나는 찬란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우아하고 단정한 예술의 도시 빈에서는 책으로 보고 간 그림들을 ‘읽는’ 재미를 느꼈고, 대사관에서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마지막 여정은 옛 사회주의의 풍모가 느껴지는 바르샤바였다. 완전히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진 도시, 바르샤바는 단단하고 차분했다.

나는 게토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리들을 걸었고, 홀로코스트 전시실에서 벽면을 따라 줄지어 걸려 있는 얼굴 없는 초상화들을 마주하며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피해의 역사 위에 가해의 역사를 덧입히고 있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저장이 아니라 선택이고, 해석이며, 미래를 향한 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기억의 방식은 방향을 가진다.

유럽의 동쪽 다섯 나라를 따라 가는 여행은 마치 독서처럼 여겨졌다. 매 장마다 풍경이 달랐고 목소리도 달랐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인물과 배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언어와 역사는 다르지만 어딘가 서로 닮아 있는, 상처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땅이었다.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돌아보니 이 다섯 나라의 공통점은 '기억'이었다.

전쟁과 폭력, 상실의 시간을 겪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 위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이 얹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