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공주’

김한기령

올 여름은 대프리카가 아닌 충남 공주에서 맞게 되었다. 어느새 퇴사 5년 차에 접어들었고 한 번도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낯선 백제 문화는 아무런 이질감 없이 스미고 소도시에서의 시간은 한갓지고 따스하고 풍요롭다. 주도적으로 계획성 있게 삶을 추구해가는 게 인생인 것 같지만 ‘불명확한 내일’이 불쑥불쑥 끼어든다. 결국 ‘오늘’로 다가온 ‘불명확했던 내일’을 마치 내가 계획한 것처럼 흔쾌히 받아들이니 신상이 편하고 조금은 살만해진다.

마찬가지로 올 4월에 갑자기 ‘오로라’를 보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계기는 2019년 12월 센터평가 워크숍 이후의 뒷풀이 자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영위원들끼리 모여앉은 자리에서의 메인 화제는 역시^^ ‘센터 사업’이 아니라 직전에 서호주 여행을 다녀온 이의 여행기였다.

“서호주 여행은 어땠나? - 너무 너무 좋더라. 다음에 같이 한번 가도 좋겠더라 - 그래? 그럼 진짜로 같이 한번 가자 - 좋다 좋다 - 일단 돈을 모아야지 – 이번 달부터 돈을 내자 – 좋 지 좋지 - ..... ”

깔깔대며 산만하게 흩어지는 말들을 정리할 틈도 없이 어느새 우리들은 통장으로 돈을 보내고 있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여행비 모으기는 1년만에 1천만원이 되었고 이제 떠나는 일정만 잡으면 된다. 그러나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서호주여행은 오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가 왔다.

돈 모으기를 중단했고 속절없는 시간들을 보내고서야 지난해 겨울, 다시 여행계획을 세웠다. 모아둔 여행비를 ‘처분’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가자’라는 마음으로 여행지를 물색하다가(5년간 품었던 서호주로의 여행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밀려나고) 결국 오로라 투어로 결정되었다.

“서호주 안되면 오로라 보러 갈래? – 그래 오로라도 좋네 – 캐나다 가야 되는데 – 응? – 그렇게 멀리 – 그러게 .. - 좀 무섭다 – 그래도 가보지 뭐 – 그러지뭐....”

딱히 다섯명 모두의 적극적 동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누군가의 적극적 반대도 없이 멀고도 신비로운 오로라투어는 그렇게 얼떨결에 정해진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벤쿠버를 경유해서 도착한 옐로나이프의 오로라는 역시 황홀했고 눈으로만 깊이 담으려던 마음이 무색하게 오로라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야만 더 짙고 선명한 빛의 축제를 볼 수 있었다. 8박 9일의 오로라 투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에는 얼떨결에 정해진 오로라 투어가 아니라 마치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버킷리스트 하나를 몇 년간의 치밀한 계획 끝에 기필코 이루어낸 것 마냥 뿌듯하고 흥분되고 감격스러웠다.

오랫동안 일해 온 동료들이었지만 일할 때도 퇴사 후에도 함께 사적 여행을 간 적이 없을 만큼 우리는 ‘일’만 했고 ‘활동’으로만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여행의 모든 순간이 물 흐르듯 순조로웠고 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즐거움이 더했다. (이건 뭐지? 여행도 ‘일’처럼 하는 건가...)

특히 숙소 뒷정리를 하면서 ‘아, 우리가 십여 년을 함께 일해 온 동료였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청소하자’는 한마디만 나왔을 뿐인데 어느새 각자의 일을 찾고 빈 부분을 채우며 순식간에 완벽하게 모든 공간이 청소되고 정리된 순간, 청소 용역업체를 차려도 될 만큼 환상적인 조합이다는 얘기를 하며 저절로 박수들이 터져 나왔다.

결국 ‘오로라’보다 ‘청소드림팀’이 더 진한 기억으로 남게 된 여행이었지만 이들과의 또 다른 여행을 기대해보는 마음이 생기기에 충분했다.  

고맙게도 어쩌면 이런 동료들과 함께 일했기에 지나온 센터 활동을 반추해보면 늘 뿌듯했고 멋졌고 귀했던 시간으로 기억되는가 보다.

이제 곧 우연처럼 만나게 된 공주살이의 첫 여름이 올 것이고, 나는 마치 오랫동안 공들여 계획한 것인 듯 내 인생의 소중한 ‘그해 여름’으로 맞이해 보려 한다.

“모든 것이 난데없고 사소하다. 동시에 연결돼 있기도 하다.(김애란)”

ps) 본문을 쓰는 시간보다 제목을 정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는 걸 믿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