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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금은 소개업자, 채무는 여성' - 한겨레신문
[속보, 사설/칼럼] 2002년 12월 15일 (일) 22:18
ㄱ씨는 97년 직업소개소를 찾았다가 전남의 한 단란주점에 1500만원에 팔려 성매매를 강요당했다. 단란주점 업주는 소개업자에게 건넨 1500만원을 ㄱ씨에게 ‘선불금’이라며 갚을 것을 요구했다. 40일 동안 일했지만 빚이 줄기는 커녕 110만원이 늘어 1610만원이 됐다. 하루 40만원의 매상을 올려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못하거나 몸이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하면 벌금이 30만원씩 붙었기 때문이었다.
ㄱ씨는 다시 1610만원에 다른 단란주점에 팔렸다가 며칠뒤 업소를 탈출해 서울로 도망쳤지만, 업소가 ㄱ씨를 ‘사기죄’로 고소하는 바람에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에서 만난 업소 주인은 의외로 순순히 ‘ㄱ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며 고소를 취하했다. 하지만, 이는 고소를 취하하자마자 풀려난 ㄱ씨를 다시 끌고가기 위해서였다. 도망친 죄로 벌금 2000만원이 덧붙여진 ㄱ씨는 빚이 모두 4000만원대로 늘어 성매매를 강요당하다 다시 다른 업소에 팔리는 등 지난해까지 모두 세 업소를 전전해야 했다. ㄱ씨는 올해 초 다시 도망쳐 사기죄로 고소됐다가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법원으로부터 ‘무혐의’ 판결을 받아냈다.
현행법상 성매매 여성에 대한 업주의 채권은 ‘무효’인데도 최근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가 ‘선불금 도주 용의자 명단’이라며 유흥업소 종사 여성 280여명의 신원을 공개하려 해 말썽을 빚었다.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는 지난 2일 ‘선불금을 떼먹고 달아난 여성’ 284명의 이름과 사진을 공개한 70쪽짜리 책자를 중앙회 회보 부록으로 유포하려다 언론의 비판으로 다음날 철회했다. 하지만,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인권운동사랑방 등 18개 여성·인권단체들이 지난 9일 ‘제작 경위’ 등에 대해 사법기관을 수사를 요청하고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는 등 대책마련에 나섰다.
‘선불금’은 겉보기에는 유흥업소 여성들에게 ‘미리 지급한 돈’을 의미하지만, 사실은 여성에게 준 돈이 아니라 이 여성을 사는 대가로 소개업자 등에게 지불한 돈이다. 업소 주인은 여성들에게 성매매 등을 통해 선불금을 갚도록 ‘차용증’을 쓰게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구조다. 실제로 여성에게 업주가 빌려준 돈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결근 또는 지각을 하거나 업소의 남성 종업원과 사귀거나 도망을 칠 경우, 각종 벌금이 눈덩이처럼 불기 때문이다. 또 종사 여성들끼리 ‘맞보증’을 서게 해 한 여성이 도망을 가면, 다른 여성이 그 여성의 빚까지 책임지도록 한다. 또 업주들은 차용각서를 근거로 도망한 여성을 ‘사기죄’로 고소하고 경찰은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려 여성들을 붙잡는다. 선불금은 유흥업소를 떠날 수 없고, 떠나더라도 붙잡혀 올 수 밖에 없는 ‘족쇄’인 셈이다.
하지만, 최근 이 선불금에 대해 ‘무효’라는 판결이 잇따르자,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라는 사조직이 공개적인 지명수배를 내린 것이다. 이들의 중앙회보 <서비스 월드>의 11월호 부록인 이 책자는 여성의 얼굴사진·이름·거주지·피해액·연락처 등을 상세히 싣고 있다. 책자 앞뒤에 실린 ‘선불금 피해 이대론 안된다’ ‘선불금 피해 극소화 방안’ 등의 글에서는 현행 법망을 피해가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중앙회보를 통해 선불금 도주 용의자를 공개수배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책자는 최근 중앙회보에 인적사항을 공개해 여성을 붙잡은 사례를 소개하면서 “회원업주들의 공동전선을 구축해 용의자들을 찾아 이들의 설 땅을 없애 버릴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은 “유흥업소의 99.3%가 성매매업소로 밝혀진데다 업주들이 마치 여성들이 성매매와 관련한 불법채무가 아니라 일반채무를 갚지 않고 도망친 것처럼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은 현행 법률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며, 자신들의 범죄사실을 은폐한 채 공개적으로 여성들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들의 불법행위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김아리 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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